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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PRISM] 동아시아 노동운동 컨퍼런스 참가기 (2)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지지난 호에 이어 홍명교 동지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주]

 

동아시아 노동운동 컨퍼런스 참가기 (2)

 

홍명교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운영위원, 플랫폼C 활동

 

동아시아에서 민주적인 대중운동을 구축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동아시아 노동운동 컨퍼런스(참고: https://www.nodonged.org/288)가 폐막하고 이튿날부터 활동가들 간의 촉진 토론회(Facilitated Discussion)가 이어졌다. 한국과 중국, 홍콩, 대만, 일본,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등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은 여덞 개의 조로 나뉘어 자유분방한 토론을 나누었다. 컨퍼런스와는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이 집중 토론은 “동아시아에서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자운동을 구축하기 위해(Build Mass, Democratic Labor Movements in East Asia)” 실제로 어떤 고민과 행동들이 필요한가에 대해 집중적인 모둠 토론을 진행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주최측은 “아시아에서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현재 동아시아 노동자운동의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한다. “노동자계급이 인구의 대다수인 반면,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노동운동은 “공식 부문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공식 부문에서도 노동자를 조직하는 대중운동”을 건설해야 하며, 그것을 위한 실천은 “권위주의 국가와 자본에 맞서 그들의 거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참가자들에게는 동시통역 번역기가 주어졌지만, 실제 모둠별 토론을 진행할 때에는 동시통역은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참가자들은 언어별로 묶여야 했는데, 가령 일본 활동가들과 영어 소통이 가능한 활동가들이 하나로 묶여 일본어-영어 통역을 통한 토론을 진행했고, 또 어떤 그룹은 한국어-영어 소통을 진행했다. 내가 속했던 그룹에서는 영어와 중국어로만 토론을 진행했는데 중국대륙과 홍콩, 대만, 한국 등 지역에서 온 참가자들이 두 언어를 섞어가며 토론했다. 

 

(사진=홍명교)

 

첫날 첫번째 세션에서는 민주적인 대중운동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건설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활동가들은 대중운동을 강화하거나 패배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주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대규모 운동에 기여한 경험까지 폭넓게 공유했다. 중국 광둥성에서 활동했던 동지의 경험, 1980년대부터 홍콩 노동운동에 기여한 동지의 경험 등이 인상적이었다. 두 지역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상당히 다른 노동체제 하에 놓여있다. 활동가들은 은연 중에 서로 활발하게 교류하지만, 동시에 단절을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차이는 홍콩과 광둥성 노동운동의 상이한 역사로 연결되어 있다.

 

두번째 세션에서는 아시아 노동운동에서의 내러티브를 공유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각 그룹은 전지들을 놓고 시간대별로 인상적인 노동운동 사건을 기록하고, 이것이 왜 승리하거나 패배했는지, 실패했다면 왜 그랬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과 대만, 홍콩, 한국, 동남아시아 등에서 전개된 20세기 노동운동의 역사를 포괄적이고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다. 가령 1989년이라는 시점에 대해 각 도시 노동운동은 톈안먼항쟁 시기의 독립노조 건설(베이징), 톈안먼항쟁 연대와 자생적 노동조합운동의 출범(홍콩), 민주화운동과 노동조합 건설(타이베이), 민주노조 운동과 전노협(서울) 등을 경험했는데 이런 투쟁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민주노조 건설 붐’이라는 동시대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동아시아 노동자계급의 이런 경험은 서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각국 활동가들이 ‘전태일 열사’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1970년의 중대한 사건에 ‘전태일’의 이름을 적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식사 후 이어진 세번째 세션은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를 주제로 한 토론을 진행했다. 필자와 같은 조에 속한 활동가들은 자기 지역에서 실시한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활동들을 소개하고, 그것이 처해 있는 어려움들에 대해 공유했다. 2010년대 중국 광둥성에서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는 노동NGO들을 중심으로 이뤄져왔는데, 이것은 2010년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 매우 활발하게 이어졌다. 중국 정부가 유일하게 합법노조로 인정하는 중화전국총공회(中华全国总工会)를 벗어나 독립적인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하진 않지만, 사측의 부당해고나 임금 체불,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맞서 광범한 투쟁들이 일어났다. 이는 “중국 노동운동의 황금기”를 낳은 바 있다. 대만의 경우 최근들어 활발하게 노조 조직화 사업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가령 소방관들의 노조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중화민국 소방관 노동권촉진회(中華民國消防員工作權益促進會)는 2013년부터 내무부 소방국과 각 지방 정부 소방국을 상대로 시민불복종운동 형태로 노동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특히 안전을 위한 노동시간 감축, 장비 교체와 운영 혁신, 노동조합 등록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9월 말 당시에도 작은 식당에서 켜둔 TV뉴스에서 소방관노동권촉진회의 기자회견 소식이 보도되고 있을 정도로 운동의 주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공무원노조 산하 소방본부와도 교류했을 정도로 상호 참조의 끈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1일차 일정의 마지막은 대만 맥주공장 방문 프로그램이었다. 100여 명의 참가자들은 두 대의 버스에 올라 공장으로 향했다. 대만맥주는 재무부가 100%의 지분을 소유한 공기업으로, 대만의 대표적인 맥주 브랜드다. 일제 식민통치 시기인 1919년 한 일본 양조기업에 의해 건설됐고, 한동안 ‘다카사고 양조장’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우리에게 맥주공장의 역사를 소개해준 대만 활동가는 이 공장의 두 가지 특성을 이야기해줬는데, 하나는 독일의 맥주 기술자에 의해 레시피가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쌀로 만든 맥주라는 점이었다. 예전에도 국내에 수입된 대만맥주를 마셔본 적 있긴 하지만, 쌀로 만든 라거맥주라는 점은 처음 알았다. 공장에 새겨진 스토리를 듣고 마시니 새삼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년이 넘은 공장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공장은 노동조합이 강력하게 투쟁한 덕분에 정부의 민영화 시도를 저지할 수 있었는데, 공장 곳곳에 게시된 노조 역사 기록들을 보며 그 자취를 이해할 수 있었다.

 

2일차에는 오전에 도시 재활용 쓰레기 수거 노동자들을 위한 권익단체 방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오후에 나머지 세션들을 이어갔다. 다섯번째 세션에서는 운동 내의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했고, 여섯번째 세션에서는 운동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틀 간의 일정의 마지막 세션을 통해서는 실천적인 국제연대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2시간반 동안 토론했다. 운동을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그 운동과 조직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 참가자들에게는 공히 그렇지 못한 경험들이 있었는데, 결국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전략적인 층위의 고민과 실천만이 아니라, 조직 민주주의를 실제화하는 것이 관건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운동을 지속하고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운동의 인프라를 확대하고 광범한 지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새롭고 젊은 조직가들을 발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확인했다. 한국에서든 대만에서든 혹은 중국에서든 젊은 조직가들을 새롭게 양성하는 문제는 매우 관건적이다. 결국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건설하는 것은 그런 젊은 조직가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실력을 다지고 현장으로 나아가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진=홍명교)

 

이틀 간의 집중 토론에 참가한 활동가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느끼는 좌절과 기대를 터놓고 공유할 수 있었고, 특히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을 구축하는 방법론과 근거에 대해 보다 세심하게 토론할 수 있었다. 또, 노동자운동을 확장하고 권위주의 정치나 자본의 착취에 맞서 싸우기 위해 어떻게 단결을 구축하고 연대 네트워크를 만들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틀의 일정을 마무리한 마지막 시간에 발언을 통해 참가 경험을 공유한 활동가들은 제각각 가슴 벅차게 이 만남의 의의를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고, 2년 후를 기약하며 더 크게 만나자는 이야기도 나눴다.

 

어느덧 동아시아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한 장소로 부상했다. 초국적자본의 착취는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지고 있고, 노동자들은 ‘바닥을 향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리를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노동자운동의 국제운동을 강화하는 것에 있다. 3일 간의 일정을 통해 이토록 많은 활동가들이 동아시아 각국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것이 우리의 희망의 근거라는 점을 확인했다. 상시적으로 연락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졌다. 이것이 보다 자주, 폭넓게 이뤄질 수 있길 희망한다. 우리에겐 단지 노동자운동만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불평등, 인종주의 등 맞서야 할 과제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