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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PRISM] 불로소득 자본주의 (2)

지난 호에 이어 임영일 재정위원장님의 글입니다. [편집자주]

 

불로소득 자본주의 (2)

 

임영일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재정위원장, (전)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신자유주의와 불로소득 자본주의

 

지주형 교수도 지적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에는 생산적·경쟁적·효율적·혁신적인 측면과 비생산적·독점적·비효율적 경향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불로소득 자본주의론이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당연 전자보다는 후자이다. 전후 황금기를 지내고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는 장기 불황과 축적 위기에 내몰렸는데, 그 와중에서 지배적 자본은 생산적 활동을 통한 정상적(?) 노동착취보다는 독점과 비생산적 활동을 통한 지대추구를 선택해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지배 자본의 동맹은 금융자본-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지대추구자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불로소득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경제의 글로벌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를 뒷받침했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상 모든 종류의 불로소득을 정당한소득으로 탈바꿈시키는 효과를 빚어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과거에는 금융과 보험, 부동산을 위시한 불로소득 부문에서의 소득은 생산적 부문에서 발생한 소득이 이전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나, 신자유주의 시기에 이르러 이 구분은 사라지고 모든 소득은 다 생산적 소득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소득은 다 생산적인 것이고, 따라서 투기 행위도 그것이 소득을 발생시키는 한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생산적 행위로 간주된다. 국가 단위의 GDP 추계나 기업 단위의 회계 모두 이를 반영하고 있다. 경제의 거품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거품속에서는 불로소득 자본 쪽으로 막대한 규모의 부당한 소득 이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또 다른 중요한 사회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부당한불로소득과 정당한불로소득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되면서, 그리고 소득이 발생하기만 하면 그것은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것이라고 간주되면서,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이 불로소득 자본주의의 단맛에 이끌려 거기에 뛰어들고, 더 이상 이를 그릇된 행동이라고 보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부러운 열망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부동산(아파트), 주식, 채권, 가상화폐 등에 대한 젊은이들의 영끌투자가 문제가 되고 있고, 이런 불로소득에 대한 투자(투기) 열풍이 초래한 막대한 가계부채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다.

 

 

그래서?

 

아무래도 더 구닥다리인 사람들이 좀 더 갸웃거리는 약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앞서도 잠간 말했듯이 불로소득 자본주의론에 대한 논란 혹은 비판은 주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고, 그 초점은 잉여가치문제였다. 아무리 불로소득이 큰 문제라고 해도 그 원천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잉여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는 생산적 산업과 기업들의 현장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그들도 불로소득의 행렬에 이미 가담했거나 가담하고 싶어 몸살을 앓는, 어떻게 보면 기득권 대열에 섰거나 그 꽁무니를 좆고 있는 상황이라 이 체제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니? 그럼 어떡하자는 말인가? 게다가 여기가 어딘가? 노동교육원 아니던가? 노동운동은 아예 문 닫아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심정이 역력한 표정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불로소득에 어디 정당하다, 부당하다의 구분이 있을 수 있는가. 노동자의 임금, 노동에 기반 해서 얻는 소득이 아니면 다 불로소득이고, 잉여노동 착취의 결과를 부당하게 나누어가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 모두가 불로소득이고 모두 부당하다. 게다가 정당한 불로소득 안에 기부금이나 사회복지 등은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어떻게 상속을 포함시킬 수가 있는가? 말하자면 이런 의문이었을 터이다. ‘상속문제는 약간의 오해 내지는 정서적 반발이기는 했다. 왜냐하면 불로소득 자본주의론의 입장, 특히 앞에 말한 낸시 프레이저의 입장이라면 아예 상속할 개인 재산이 따로 없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역시 부동산과 주식 등에 집착하고 있고,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최근에는 젊은 층 중심으로 일부 저소득·불안정 노동자들 역시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임혜숙 원장은 우리 교육에서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등은 노동자로서는 특히 활동가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해왔는데, 최근 수강생 중 주식이나 코인 투자 하는 사람이 열에 여덟임을 알고 참 혼란스러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빚을 내어 투기적으로 아파트에 투자하거나 주식에 투자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고, 해도 그 액수가 많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향적으로 그 비중이 커질 밖에 없는 조건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현실을 인정하고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수용 가능한 불로자산의 종류, 크기, 획득방식 등을 구체화해주는 것은 어떨까? 그래야 노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무언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도덕적 부담감, 이중적 의식의 어정쩡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매우 일각에서의 특수한 논의에 불과하지만, 소위 쁘띠 부르주아 사회주의주창자들은 아예 사회주의 운동이란 절대로 모두가 무산자 프롤레타리아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정한 자산을 가지고 동시에 생산적 노동에도 종사하는 쁘띠 부르주아가 되자는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도 공산 사회에 대해서 자유로운 소생산자들의 연합사회라 말했으니 가히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짐작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이 논의는 사실상 중국 시진핑이 말하는 소강사회혹은 공동부유사회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기도 하다.

 

임영일 선생님께서 직접(!) 그려서 주셨습니다. [편집자주]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되니 분위기가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시간도 없고 슬슬 공부 끝내야 하는 상황임을 느끼고 필자는 간단히 그림 하나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우리 GDP가 국내에서 어떻게 배분되고 있나? 자본의 몫은 얼마고 노동의 몫은 얼마인가? 노동자들 내에서는 얼마나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나?” 이런 문제들을 따지는 것은 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불로소득론자들이 말하는 자산의 문제는 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A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자본주의 성장 과정에서 매년 생산된 부(가치)가 그 사회에 축적되어 남아 있는 총량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같은 것을 놓고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맞니 그르니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고, 이 두 개의 논의를 잘 엮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자 역시 경제학자인 김성희 선생이 한 마디 콕 찔렀다. “전자는 플로우(flow) 이야기고 후자는 스톡(stock) 이야기지.” 역시....이날의 피날레였다.

 

사족을 달면, 우리는 전통적인 임금의제와 더불어 자산의제에도 집중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여주었던 어떤 노동운동이 있었음을 안다. 스웨덴 노총(LO)은 전국적 집중 단체교섭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노동자들의 임금인상과 더불어 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자 축소에도 진력했고(연대임금 정책), 그 결과 내부 임금 격차를 ±6%까지 줄였던 역사가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기업의 자산(주식)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정책(임노동자기금 정책)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기업을 노동자 집단소유 기업으로 바꾸려 했던 경험이 있다. 전자가 문제였다면 후자가 A 문제였던 셈이다. 우리 노동운동이 이런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내 기억으로는 대기업 노조들이 보너스를 회사 주식으로 요구해 나누어 받았다가 각자 필요할 때 팔아 썼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었다. 에고, 공부할 것은 많은데, 모두 자꾸 늙어만 간다.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