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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문학

[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_(22) 적록 동맹 : 공유지와 장애물 ①

박장현 교과위원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교과위원

 

적록 동맹 : 공유지와 장애물 ①

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

아론 바스타니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마주 읽기

 

물과 불

물과 불이 서로 합쳐질 수 있을까?

 

옛사람들은 세상이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 , 공기, 흙이다. 그중 물과 불은 서로 상극’(相剋) 관계에 있다. 물은 불을 꺼뜨려서 없애버리고, 불은 물을 증발시켜서 없애버린다. 둘은 서로 어울릴 수도 없고, 합쳐질 수도 없다.

 

 

영화 <엘리멘탈>은 이런 상식과 통념을 뒤엎고 물과 불이 서로 어울리고 마침내 합쳐지는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었다. 상극(相剋) 관계를 상생(相生) 관계로 바꿔냄으로써 물과 불은 새로운 미래를 잉태하게 된다. 과연 무엇이 둘을 합쳐질 수 있게 만들었을까?

 

오늘날 적색과 녹색은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녹색은 적색을 생태계 파괴의 공범으로 원망한다. 자본가들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자연을 파괴하는 활동을 집행하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자연을 무한정 수탈할 수 있는 기계를 제조하는 것도 노동자들이고, 그 기계를 운전하는 것도 노동자들이다. 그 대가로 분배받은 포드주의 고임금(高賃金)을 뿌리면서 대량으로 소비하는 것도 노동자 대중이며, 그 쓰레기를 대량으로 폐기하여 생태계를 오염시키는 것도 노동자 대중이다. 흔히 자본가와 노동자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자연을 수탈하고 오염시키는 일에 있어서 둘은 서로 동맹자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적색은 녹색을 반노동(反勞動) 세력으로 의심한다. 녹색은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 노동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노동자 대중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손상시킨다.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여 일자리를 없애는 것도 녹색이고, 석탄 발전소를 금지하여 에너지를 비싸게 만드는 것도 녹색이다. 노동자 대중에게 GMO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고, 종이컵 하나도 버리지 말라고 한다. 노동하는 사람의 인권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길고양이의 동물권에만 관심이 많은 것이 녹색이다.

 

이런 녹색과 적색이 과연 적록동맹으로 합쳐질 수 있을까? 만약 합쳐질 수 있다면, 무슨 이유 때문에 합쳐질 수 있고, 서로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합쳐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21세기 노동해방운동의 흐름을 가늠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기 위하여 2022년에, 거의 동시에, 출간된 두 권의 책을 맞대보며 읽기로 한다. 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와 아론 바스타니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이다. 두 책은 각각 21세기 생태운동과 노동해방운동의 이유와 방법을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어서, 마주 읽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특히 두 책 모두 추상적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안하고 있어서 맞대보며 읽어볼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히켈과 바스타니가 각각 세계 생태운동과 노동해방운동의 공인된 대변인도 아니며, 세계 녹색운동과 적색운동이 저마다 통일된 강령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두 책을 마주 읽는다고 하더라도 적-록 문제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는 힘이 닿는 데까지 다른 자료들을 구하여 보충하면서 읽어나가기로 하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마주 읽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오늘날 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이 맺고 있는 원망-의심 관계를 짚어보고 들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두 운동이 거쳐온 역사적 맥락을 짤막하게 더듬어봐야 할 것이다.

 

19세기는 노동운동의 시대였다. 19세기는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에 맞서서 불가역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새로운 지배질서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운동이 태동하고 성장해간 시기였다.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민주의등등의 이름을 내걸면서 다양한 이론적실천적 모색이 이어졌다. 그들은 때때로 서로 경쟁하기도 했지만, ‘노동자 대중이라는 공유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노동운동은 두 개의 바퀴로 전진하였다.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세력화운동이었다. 노동조합운동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출발했던 협동조합운동은 역사가 흐르면서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뒷날을 기다리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인민대중의 보편적 정치권을 목표로 삼았던 19세기 민주화운동의 대중적 추동력은 실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 운동에서 나왔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일찍부터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던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보편적 선거권이 확장되면서부터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사민주의 세력이 전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리고 20세기 접어들면서부터 선거를 통하여 때때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선거를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던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노동운동이 이런 길을 걸었고, 20세기 중반까지 지구상의 1/3가량의 국가들에서 이런 식으로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다. 그에 따라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게 되고, 20세기 내내 두 진영 사이의 체제경쟁이 이어지게 된다. 열전과 냉전이 교차하면서 지속되었다.

 

-서 경쟁은 생산력 경쟁이었다. 그것은 본래 자본주의 시장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시장은 자본들 사이에 생산력 경쟁이 이어지는 전쟁터이다. 승리하면 살아남아 번창할 수 있고, 패배하면 죽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시장에서 작동하고 있는 적자생존-승자독식의 법칙이다. 20세기 내내 이어진 진영대결에서도 바로 이런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였다.

 

생산력 경쟁은 죽느냐 사느냐 경쟁이었고, 양쪽 모두 물불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자연을 채굴하고 개조하는 데 매달렸다.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자원을 조달하여 더 많은 무기와 소비재를 생산하는 쪽이 이긴다. 과학기술은 경쟁의 첨단무기로 복무해야 했다. 생사경쟁이 지속되는 동안 자연보호는 한가한 이야기로 들렸다. 양쪽이 서로 상대방을 욕하면서도 닮아간 공통의 종착점은 포드주의로 발현된 성장주의였다.

 

1920~30년대 소련에서 간행된 잡지. 잡지제목 &lsquo;Bezbozhnik&rsquo;은 &lsquo;무신&rsquo;(無神)을 뜻한다.

 

 

20세기 전반기, 자본주의 진영 안에서 노동운동의 역사적 전진과 자본가 집단의 교활한 양보를 통하여 성립된 포드주의 체제는 대량생산-대량소비를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노동자들의 인질 상태를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상태로 바꾸었다. 사민주의 노동운동은 여기에 만족하면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20세기 중후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는 이른바 사민주의 황금기가 지속된다.

 

그곳에 녹색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등장한다. 두 세기에 걸친 자본주의 경제활동을 통하여 누적된 생태위기가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사민주의 노동운동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 대중에게는 내일 바닷물에 잠겨 죽는 일보다 오늘 당장 굶어 죽는 일이 더 급하다는 변명이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시장경쟁이 지속되는 한 노동자는 자신을 고용하고 있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일부) 공유할 수밖에 없다. 자본이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노동자의 일자리도 안정될 수 있고, 임금도 인상될 수 있다. 자본이 경쟁에서 패배한다면 노동자도 패배자로 된다. 불안정한 실업급여로는 안정된 임금을 대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자본이 시장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면, 노동자도 물불을 가리기 어렵다. 자본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무한정으로 자연을 채굴해야 하고, 가공해야 한다. 거기에 반대하는 행동은 곧 내 밥그릇을 내 발로 걷어차는 행동으로 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노동자들이 시장경쟁의 인질로 살아가도록 만든다. 거기서 해방되자는 것이 노동운동의 꿈이다. 그러나 꿈은 손목을 끌고, 현실은 발목을 잡는다.

 

산업벽화, 디에고 리베라, 1933년, 디트로이트 미술관

 

 

노동자대중의 집단적 저항이 없었던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는 곧 대량채굴-대량폐기 시대였다. 사민주의 황금기에 생태위기는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그런데 노동운동은 그것을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대량채굴-대량폐기에 기반을 둔 고용안정-임금인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녹색운동이 노동운동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아마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해보자. 노동해방운동도 생태운동도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맞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적색운동과 녹색운동이 생겨난 이유였으며, 앞으로도 양쪽의 공유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의 적에 맞서는 방식과 순서에 있어서 양쪽은 지금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으며, 지금도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노동해방운동과 생태운동은 <엘리멘탈>의 물 원소와 불 원소처럼 서로 가까워질 수도 없고 서로 멀어질 수도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런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양쪽이 저마다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계속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자기보호 수단을 향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1세기 접어들면서 자본주의 정치경제 지형이 급박하게 변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볼 때, 양쪽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가하게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지속한다면 조만간 양쪽 모두 자신의 존립 기반까지 상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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