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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문학

[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_(19) ‘상품화’ : 자본주의 경제의 출현

박장현 교과위원님의 <노동인문학>입니다. [편집자주]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상임교과위원

 

자본주의 경제의 출현

 

한편으로 보면 상품은 자본 형성의 전제조건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상품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산물이며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모든 생산물은 상품이라는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형식을 띤다. 자본주의보다 앞선 생산단계에서는 생산물의 일부만 상품이라는 형식을 가졌었다. 그에 반하여 자본은 필연적으로 모든 생산물을 상품으로 생산한다.
(맑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
 

상품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과 서비스를, ‘상인은 상품의 거래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장은 상인이 상품을 교역하는 공간 또는 네트워크를 뜻한다.

 
기원전 3천3백 년경의 진흙 토큰, 이란 수사 지방 출토
 

시장, 상인, 상품은 인류 문명이 태동할 때부터 존재해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적과 유물은 상업이 꽤 번성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벌써 화폐가 통용될 정도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화폐는 기원전 33백 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문명, 인도 문명, 중국 문명에서도 마찬가지로 상업이 번성하였다. 근거리 역내 교역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이어주는 원거리 역외 교역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수천 년 농경시대 내내 시장은 사회구조의 기축적 요소가 아니라 보족적 요소로 존재해왔다. 자본주의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비로소 시장은 사회구조의 기축적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대전환을 상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연구자들이 있다. 나도 그들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상품경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현되었을까?

 

그것이 유럽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별로 이견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연구과제가 도출된다. 농경시대 내내 경제가 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던 중국, 인도, 아라비아 등 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지 않고, 왜 유럽에서 그것이 시작되었을까?

 

한편,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고 있는데,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묶을 수 있다. 그들의 의견 차이는 상호대립적인 성격이 아니라 실은 상호보완적 성격을 띠고 있다.

 

먼저, 맑스주의자들은 18세기에 그것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기계가 발명되고 공장이 설립되면서 대규모 임금노동자 집단이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유통과정보다 생산과정을 더 주목한다.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자본의 이윤도 창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규모 임금노동자 집단의 등장과 자본주의 경제의 출발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한편, 월러스타인 등 세계체제론자들은 16세기에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중심부(=제국)와 주변부(=식민지) 사이의 분업을 자본주의 출현의 전제조건이라고 본다. 중심부는 원료를 수입하고 완성품을 생산한다. 주변부는 원료를 생산하고 완성품을 수입한다. 둘 사이의 분업과 교역은 흔히 정복과 약탈의 형태를 띠면서 진행된다. 아무튼 이런 글로벌 분업체제가 형성되면서 자본주의가 시작된다. 세계체제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이어진 16세기의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유도시의 발달을 자본주의 출발점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막스 베버, 앙리 피렌느, 에릭 밀란츠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11세기 지중해 무역의 부활과 더불어 유럽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흔히 코뮌이라고 불리던 자유도시들에서 12세기경에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상공인 집단의 정치세력화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본주의 출현의 결정적인 추동력이었다고 본다.

 

세 가지 이론은 저마다 장님 코끼리 더듬기 같은 대답을 내놓고 있어서, 자본주의 출현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 가지 이론을 합쳐본다면 자본주의 출현의 역사와 원리를 훌륭하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한 사회 안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대립·통일적 분업을 수행하면서 잉여가치와 이윤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회 바깥의 요인들이 가치의 생산과 분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편이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이런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이처럼 맑스주의와 세계체제론을 합쳐보면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포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이론은 주로 자본주의 하부구조의 형성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자본주의 상부구조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베버 등은 자유도시 연구를 통하여 이런 결함을 메워주고 있다.

 

다시 앞에 언급한 연구과제로 돌아가보자. 농경시대 내내 경제가 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던 중국, 인도, 아라비아 등 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지 않고, 왜 유럽에서 그것이 출현했을까?

 

베버는 자유도시의 역사에서 그 대답을 찾았다. 봉건적 농경시대 말기에 유럽의 상인들은 자유도시를 건설하고 정치세력화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그에 반하여 아시아의 상인들은 자유도시를 건설해본 적이 없었다. 자유도시가 처음 출현한 곳은 지중해 연안이었으며, 그 시기는 11세기 무렵이었다.

 

본래 지중해는 옛날부터 아프리카-유럽-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이 왕성했던 곳이다. 중국과 인도에서 출발한 아시아 대륙의 교역품들은 육로와 해로를 거쳐 지중해 동부 연안 레반트 지역의 항구 도시들에 모였다. 여기서 지중해를 거쳐 이탈리아 북부 연안 도시들로 이동한 교역품들은 육로를 거쳐 유럽대륙으로 퍼져나갔다. 또는 레반트 항구도시에서 지중해를 서쪽으로 가로질러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서 북유럽 항구도시로 이동하기도 했다.

 

고대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감싸는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될 수 있는 정치적·군사적 환경을 제공하였다. 5세기경부터 로마제국을 침공하기 시작한 여러 갈래의 게르만족이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하면서 지중해의 정치적·군사적 통일성은 무너진다. 그러나 그 뒤에도 해상무역을 통한 지중해의 경제적 통일성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급성장한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동쪽 레반트 지역과 지중해 남쪽 북아프리카 지역을 장악한다. 그 결과 유럽 상인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왕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길이 끊어지게 되고, 중세 시대 유럽대륙은 봉쇄된 채 수백 년을 보내게 된다. 유럽대륙을 차지한 여러 갈래 게르만 민족은 수많은 봉건주의 국가들로 찢어져 있었으며, 그들 사이의 교역은 별로 활발하지 않았다. 동방무역이 차단된 농업국가들 사이에는 서로 교역할 물품도 별로 없었다. 이처럼 안팎으로 교역이 축소되면서 유럽에는 수 세기 동안 상업의 침체기가 이어지게 된다.

 
 

 

상업의 부활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8차례에 걸쳐 진행된 십자군 전쟁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봉쇄로 인하여 유럽대륙 안에 갇혀 있던 기독교 세력은 11세기경 다시 지중해로 진출할 길을 찾아나선다. 교황은 예루살렘 성지 회복이라는 깃발을 치켜들었고, 상인들은 레반트 지역 항구도시의 확보에 침을 흘렸다. 그리고 십자군은 레반트 지역의 몇몇 주요 항구도시들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유럽 상인들에게 동방을 향한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11세기까지 지중해 무역의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유럽 상인들은 주로 향신료, 약재, 비단, 귀금속 등 부피는 작으면서도 값은 비싼 완제품들을 동방에서 수입하였다. 소수의 특권층을 겨냥한 사치품들이었으며, 인민대중의 노동과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용품은 아니었다. 수출품으로는 목재, 금속, 올리브유 등 원자재와 농산물을 꼽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중국, 인도, 아라비아와 비교했을 때 유럽의 생산력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지중해 무역의 부활과 더불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자본가 계층이 출현한다. 가장 빠른 곳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 이탈리아 북부 항구도시들이었다. 11~12세기까지 유럽의 전형적인 상인은 상품을 지니고 몸소 원거리를 이동하는 순회상인이었다. 그들은 소상인이었다. 그들의 사업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지만, 성공할 경우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모험상인의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하여 지중해 무역은 정주상인을 출현시켰다. 상업도시에 거주하면서 원거리에 있는 외부시장과 교역하는 상인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굴리는 대상인이었다.

 

15세기 중엽 베네치아 무역상인이 지중해 무역에 투자한 금액은 1만 두카토(1두카토=3,56그램의 금) 정도였고, 이 정도의 자본력을 가진 대상인이 적지 않았다. 벌써 14세기 중엽 이탈리아 피렌체의 바르디 상사와 페루치 상사는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백년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각각 90, 60만 피오리노(1피오리노=3,53그램의 금)를 빌려줄 정도로 엄청난 자금을 보유한 국제금융가들이었다.

 

대상인의 무역망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고용 규모도 적지 않았다. 정주상인은 자신을 대신하여 원격지 시장에서 교역을 수행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 주재원을 대리인으로 파견하거나, 현지 상인을 대리인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14세기 중엽 바르디 상사는 영국, 프랑스, 플랑드르 등에 365명의 대리인을 고용하고 있었으며, 페루치 상사는 144, 작은 규모였던 알베르티 상사는 56명의 대리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상업의 발달은 임금노동자 집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지중해 무역은 우선 해상물류와 관련된 수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선박을 운항하는 데도 노동자가 필요했고, 항구에서 교역품을 하역하는 데도 노동자가 필요했다.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에도 노동자가 필요했다. 농촌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수많은 농부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항구도시로 몰려들었다. 아직 공장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러나 항구도시에는 벌써 임금노동자 집단이 우글거렸다.

 

임금노동자 집단의 형성과 관련하여 양모산업의 발달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지중해를 통한 동서 교역이 성행하던 시기 내내 유럽은 동방과의 무역에서 항상 적자 상태에 있었다. 중국, 인도, 아라비아에 비하여 생산력이 낮았던 유럽은 수입해올 것은 많았지만, 수출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꼽을 만한 게 모직물 정도였다. 모직물이 없었더라면 아마 유럽 상인들은 동방과의 무역을 지속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럴수록 모직물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유럽산 모직물의 동방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물류산업보다 더 많은 노동인구가 필요한 곳이 새로 생겨나게 된다. 양모 가공 매뉴팩처였다. 모직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상인들은 중개무역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제조업자로 나서게 된다. 처음에는 선대제(先貸制)를 통하여 농촌에서 모직물을 수집하더니, 이어서 도시에서 대규모로 노동자를 고용하여 모직물 매뉴팩처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양모 가공 산업이 가장 발달한 곳은 네덜란드 플랑드르 지방과 이탈리 피렌체였다. 오랫동안 피렌체 도시국가를 지배하면서 르네상스 문화의 출현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이름을 떨친 메디치 가문은 본래 모직물 길드에 소속된 상인 집안이었으며, 피렌체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모직물 매뉴팩처를 직접 운영하였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모직물 매뉴팩처, 미라벨로 카바롤리, 1570년

 

모직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양털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특히 영국의 양털은 품질이 좋아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농업 대신 목축업을 해야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영국 지주들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인클로저 운동이 영국에서 가장 대규모로 일어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토머스 모어의 표현대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일이 벌어진 시대였다. 양떼에게 밀려나서 농토에서 쫓겨난 농부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임금노동자가 되거나, 숲속으로 들어가서 도둑이 되어야 했다. 어느 쪽이든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길이었다.

 

양모산업이 발달하면서 교역품의 성격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양모산업은 도시의 규모를 키원고,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의 교역도 늘어났다. 무역산업에 종사하든 양모산업에 종사하든, 도시인들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부가 아니었다. 1300년경 벌써 인구가 10만을 넘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대도시들은 인근 농촌에서 생산된 곡물로는 인구를 부양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좀 더 먼 곳에서 곡물을 구해와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 말 식량 수송은 지중해 해상수송의 중요한 일부가 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모직산업의 발전은 원자재의 교역을 증가시켰다. 특히 명반은 모직물의 염색에서 빠질 수 없는 원료였다. 명반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노바 상인들은 거대한 선단을 구성하여 지중해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이처럼 지중해 무역은 소수 특권층을 위한 사치품 교역을 넘어서서 인민대중의 노동과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상품을 교역을 늘려나가게 된다.

 

물론 11세기 무렵 지중해 무역에서 촉발된 변화가 하루아침에 온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니다. 농업과 세습신분제에 바탕을 두고 있던 봉건사회가 상공업과 자유경쟁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