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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문학

[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_(12) 평등주의 사회계약

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 입니다. 오늘도 깁니다! [편집자주]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평등주의 사회계약

 

평등주의 사회계약의 목표

 

사과를 훔쳐먹는 견습공 루소, <고백록> 삽화

 

과연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이 저마다 독립의 즐거움과 교류의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을까?

 

루소는 이 문제를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보았다. 그가 새로운 사회계약을 통하여 풀고자 했던 문제도 바로 이 문제였다. <사회계약론>에서 그는 해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체와 재산을 공동의 힘을 다하여 지킬 수 있는 결속방식(association)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방식에 따라 저마다 모든 사람과 결속되면서도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이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계약이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이다.
(루소, 사회계약론, 175~176)

 

루소가 제안한 새로운 결사체개념은 그 뒤 세계만방의 (거의) 모든 평등주의자들이 공유하는 공준(公準)으로 된다. 그들은 루소의 근본문제를, 저마다 표현만 조금씩 바꾸면서, 그대로 이어받았다. 19세기에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루소의 공준을 이어받았다. 그들과 대결하면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던 맑스도 그것을 이어받는다.

 

1843, 쾰른에서 급진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청년 맑스는 프로이센 왕국의 탄압에 쫓겨서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파리로 향하던 길에 그는 약혼녀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하여 잠시 크로이츠나흐에 체류하게 되는데, 거기서 다섯 권의 독서노트를 남긴다. 그중 한 권에는 위에 인용된 루소의 <사회계약론> 구절이 글자 그대로 발췌되어 있다. 그리고 5년 뒤, 맑스는 엥겔스와 함께 작성한 <공산당 선언>에서 루소의 새로운 결사체개념을 다음과 같이 되풀이한다.

 

고유한 계급들 및 계급대립을 지닌 자본주의 사회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으로 되는 하나의 결사체(Assoziation)가 들어선다.
<맑스·엥겔스, 공산당선언>

 

 

평등주의 사회계약의 철학적 토대

 

신의 섭리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중세 봉건주의 사회와 개인의 이기적 자유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근대 자유주의 사회를 넘어서서 새로운 결사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토대가 필요했다. 루소는 개인들의 보편적 의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루소를 따르자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모든 개인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보편의지를 확인하는 계약이며, 저마다 자유의지에 따라 그 보편의지에 복종하겠다고 서약하는 계약이다. 만약 보편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새로운 결사체도 건설될 수 없다.

 

사회계약에서 본질만 간추려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 개인의 인격과 그가 가진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삼아 보편의지라는 가장 우월한 지배 아래 둔다. 그리고 우리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이런 결속행위는 곧바로 특정 계약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하는 하나의 정신적이고 집합적인 결사체(association)를 만들어낸다. 이 결사체는 집회에서 투표자와 동일한 수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통일된 공동체의 생명, 정체성, 의지는 집회를 통해서 부여된다. 이처럼 모든 사람의 결속으로 형성되는 이 공적인 인격체를 예전에는 도시국가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공화국또는 정치체라고 부른다.
사회계약이 허무한 법규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계약은 누구든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결사체 전체가 그에게 복종을 강요한다는 약속까지 암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 약속만이 다른 약속에 효력을 부여할 수 있다.
(루소, 사회계약론, 177, 180)

 

새로운 사회계약은 구성원 하나하나를 그 모든 권리와 더불어 공동체 전체에게 전면적으로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누구든 보편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공동체 전체가 그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가장 큰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을 꼽으라면 아마 바로 이 대목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바로 이 대목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루소에게 파시즘의 원조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정치적 논란은 철학적 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과연 보편의지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여기서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지난 수천 년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보편자 논쟁의 역사를 훑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루소의 보편적 의지를 이해하는 데는 그가 주요 논쟁 상대로 삼았던 몇 사람만 살펴봐도 충분할 것이다.

 

얼핏 보면, 루소의 보편의지는 우선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빼닮았다. 개인들에게 전면적인 양도와 복종을 강제할 수 있는 무서운 괴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핏 볼 때 그럴 뿐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법률의 효력이 미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달리 말해서, 예외적인 개인이었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절대주의 옹호론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예외적 존재를 인정한 데 있었다. 그와 달리 루소의 보편의지는 예외적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편의지는 특정 개인 또는 특정 혈통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세습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보편적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와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법은 특권의 존재를 얼마든지 정할 수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을 지명하여 특권을 줄 수는 없다. 이처럼 법이 의지의 보편성과 대상의 보편성을 결합하고 있다면 나는 법으로 다스려지는 국가를, 그 통치형식이 어떻든 간에, 모두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루소, 사회계약론, 191, 197~198)

 

한편, 루소의 보편적 의지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도 다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을 구성하는 개인들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는 초월적 존재이다. 시장 속의 모든 개인은 저마다 오로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거래를 수행한다. 그에 반하여 보이지 않는 손은 이기심이 손톱만큼도 없으며, 오히려 최대다수에게 최대행복을 보장해주는 선량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을까? 성경은 하느님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보이지 않는 손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달리 루소의 보편적 의지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내재적 존재이다. ‘저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의지들 속에 들어 있는 공통부분이다. 수학 용어를 빌려와서 표현한다면, ‘서로 다른 자연수들 속에 들어 있는 공약수와 같다.

 

두 자연수를 보자. 12는 자신 속에 1, 2, 3, 4, 6이라는 약수를 가지고 있다. 181, 2, 3, 6, 9라는 약수를 가지고 있다. 두 자연수의 공약수는 1, 2, 3, 6이다. 만약 두 자연수가 사회계약을 맺기로 한다면, 그들은 공약수를 뽑아서 사회계약의 내용을 채우게 될 것이다. 이때 공약수는 두 자연수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두 자연수가 공약수를 가질 수 있듯이, 두 개인은 보편적 의지를 가질 수 있다. 이때 보편적 의지는 개인들의 개별의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루소는 바로 이런 내재적인 공통의지를 새로운 사회계약의 토대로 삼았다.

 

전체의지와 보편의지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체의지는 개인적 이익만 생각하는 개별의지들의 총합이다. 그에 반하여 보편의지는 공통의 이익만 생각한다. 개별의지들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 부분을 빼고 나면 공통부분의 합계로서 보편의지가 남게 된다.
개인들의 개별적인 이해관계 속에 들어있는 공통적인 것이야말로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다. 모두의 이익이 일치하는 공통부분이 없다면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는 오로지 공통의 이익을 토대로 삼아 통치되어야 한다.
(루소, 사회계약론, 188, 185)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루소의 보편의지는 기독교의 하느님또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개인들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내재하는 것이다. 이런 보편의지를 사회계약의 새로운 토대로 삼음으로써 루소는 민주주의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를 정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세 봉건주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기독교의 초월주의 토대를 허물어버리는 동시에, 근대 자유주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시장방임주의 토대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토대였다.

 

 

평등한 자유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유주의자들이 평등을 혐오하면서 내세워온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말이었다. 개인의 자유는 자연권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한하는 것은 자연에 위배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자연을 위배해온 것은 평등주의자들이 아니라 실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말문이 막힐 때마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논거로 내세우면서 토론을 막아버렸다. ‘이든, ‘괴물이든, ‘보이지 않는 손이든, 이름만 달라질 뿐이었다.

 

루소는 달랐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연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뜻에서, 그를 자연주의자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그가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다면,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루소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손익계산서를 제출하였다.

 

사회상태에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받았던 많은 이익을 상실하지만, 반면에 그것을 대신할 매우 큰 이익을 획득한다. 그런 모든 득실을 비교하기 쉽게 요약해보자. 사회계약을 맺음으로써 인간이 상실하게 되는 것은 그의 자연적 자유와 그가 자연상태에서 혹시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를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리이다. 반면에 사회계약을 맺음으로써 인간이 획득하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그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다. 이런 이해득실에 대해서 그릇된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의 힘 외에는 제한이 없는 자연적 자유를 보편의지에 의해서 제한된 시민적 자유, 즉 사회적 자유와 선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루소, 사회계약론, 180~181)

 

자연적 자유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 즉 모든 사회적 끈에서 벗어나는 자유였다. 철학자들이 흔히 쓰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현존재로부터 도피하는 자유’(freedom from existence)이다. 그에 반하여 시민적 자유는 사회적 끈으로 결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누리는 자유이다. 달리 말해서, 보편적 의지를 통하여 제한된 자유이다.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자면, ‘현존재 속에서의 자유’(freedom in existence)이다.

 

루소의 새로운 사회계약은 개인들의 자연적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모두에게 평등한 시민적 자유를 보장해준다. 보편의지는 무분별한 욕구와 이기심으로 채워진 자연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을 뿐, 시민적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곧 입법자들이기 때문이다. 보편의지에 포함될 공약수의 목록을 결정하는 것은 입법자인 시민들이다.

 

그러므로 시민들이 결사체의 보편의지에 복종하는 것은 결코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저마다 자유의지에 따라 사회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따른다는 말은 자기 자신과 약속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것은 다른 누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사체의 보편의지에 복종한다는 것도 곧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복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을 자유의 제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주권행위란 본래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체와 약속을 하는 행위이다. … 시민들이 이런 약속에만 따르는 한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지에만 복종하게 된다.
(루소, 사회계약론,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