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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문학

[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_(14) 지배 없는 세상

한 회 쉬고 돌아온 박장현 원장님의 <노동인문학> 입니다. [편집자주]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프루동, '아나키즘의 아버지'

 

 

19세기 중반기에 유럽 노동운동에서 사상적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피에르-조셉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을 꼽아야 할 것이다. “소유란 도둑질이다.” 프루동의 외침은 꽉 막혀 있던 유럽 노동자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뚫어주었다. “어떤 권력, 어떤 지배도 인정할 수 없다.” 그의 무정부주의 사상은 점점 더 많은 유럽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어나갔다. 뒤에 젊은 맑스가 프루동을 가혹하게 비판하며 나서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무정부주의가 유럽 노동운동의 흐름을 주도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소가 ‘평민 출신’ 사상가였다면, 프루동은 ‘노동자 출신’ 사상가였다. 그는 1809년, 시골 양조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제때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여 12세에 겨우 시립학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졸업 직전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18세부터 인쇄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3년 뒤에 기능공이 되었으며, 8년 동안 일자리를 찾아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인쇄공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푸리에가 쓴 <사회적 산업의 새로운 세계>라는 책을 인쇄한 적이 있는데, 이때 푸리에와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공부에 대한 욕구와 재능이 매우 컸던 프루동은 독학으로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다. 1838년부터는 고향 시립아카데미의 장학금을 따서 3년 동안 파리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에 그의 첫 대표작 <소유란 무엇인가?>를 발표한다. 그 뒤 다시 몇 년 동안 인쇄공으로 이곳저곳을 떠도는 동안 프루동은 1846년 <경제적 모순의 시스템과 빈곤의 철학>을 발표한다. 이듬해 맑스는 <철학의 빈곤>을 내면서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사정없이 프루동을 논박하고 나선다.

 

1848년 프루동

 

프루동은 1847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영향력을 키우는 한편,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주의 학습모임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점차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해나가게 된다. 1848년 2월 혁명에 참가했으며, 4월에 제2공화국 제헌의회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6월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된다. 1849년 프루동은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죄로 기소되어 1852년까지 감옥에 갇혀야 했다. 석방 뒤에 그는 벨기에로 망명하여 1862년까지 지냈으며, 1863년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는 1865년에 죽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1871년 파리 코뮌을 일으키는 주력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로버트 오웬이 원인을 그냥 둔 채 결과를 교정하고자 한 사람이라면, 프루동은 원인을 정면으로 파고든 사람이었다. <혁명가의 고백>(1849)에서 프루동은 인민대중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는 세 가지 원인을 ‘자본-정부-교회’로 적시하면서 그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자본주의 경제 관념, 정부 또는 권위기구의 정책, 그리고 교회의 신학 관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 있는, 세 개지만 하나인 관념이다. 그중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 모두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자본이 노동에 대하여, 국가가 자유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가 정신에 대하여 하고 있는 짓, 이것이 절대주의 삼위일체이다. 그것은 철학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치명적으로 유해하다. 인민대중을 억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그들의 육체와 의지와 이성을 동시에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프루동은 원인을 발본색원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사유재산은 도둑질이다”라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정부를 없애버려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그가 꿈꾼 대안세상은 “신도 없고 주인도 없는” 세상, “권력 없는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프루동은 자신을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사상가이다. 그가 볼 때, 국가기구는 모든 권력지배의 최후보루였다.

그러나 프루동은 ‘폭력혁명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에 대해서 반대했으며, ‘무산자계급 독재’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그가 볼 때 둘은 일란성 쌍둥이였다. 우선 그가 폭력혁명을 반대한 이유를 1846년에 맑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읽어보자.

 

또한 당신 편지 속에 들어 있는 “행동의 순간에는”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겠습니다. 아마 당신은 폭력행위를 통하지 않고는, 이전에는 ‘혁명’이라 불렸고 실제로는 쇼크요법인 것을 쓰지 않고는, 현재로서는 개혁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견해를 아직도 견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견해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양해도 할 수 있고, 기꺼이 토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가지 공부를 통하여 저는 그런 견해를 완전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성공을 거두기 위하여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혁명적 행동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장된 수단이 실은 그저 폭력을, 독단을, 간단히 말해서, 모순을 불러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문제를 푸는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경제적 조직방식에 의하여 사회로부터 도둑질당한 부(富)를 다른 경제적 조직방식에 의하여 사회로 되돌려주는 것이죠. 사유재산과 사유재산이 서로 맞부딪치는 지금의 정치경제학 이론을 당신네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저로서는 일단 ‘자유’ 또는 ‘평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을 창출하는 이론으로 바꾸는 것이죠.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수단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제일 밤에 벌어졌던 것처럼, 소유자들에 대한 대학살을 단행함으로써 오히려 소유권을 새로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는 길이 아니라, 소유권을 약한 불로 서서히 태워버리는 길을 선택하고자 합니다. 
(1846년 5월 17일, 프루동이 맑스에게 보낸 편지)

 

184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프루동은 국가사회주의자 루이 블랑(Louis Blanc)이 2월 의회에서 법령을 통과시켜서 설립한 ‘국립공장’의 취지에 동의하지 않았다. 국립공장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세워진 일종의 구제기관이었다. 프루동은 이런 구제기관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반동세력이 그것을 폐지하려고 나서자 프루동은 루이 블랑 편에 서서 함께 싸웠다. 실업자들의 생계를 해결할 다른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폐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반동세력의 뜻대로 국립공장은 결국 폐쇄되었으며, 이것이 인민대중의 분노를 자극하여 7월 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폭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루동은 폭력에 반대하고 나선다. 그는 ‘폭력에 의한 변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평생 동안 일관성 있게 견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무산자계급의 독재’도 반대했다. 그가 볼 때, 폭력혁명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은 ‘무산자계급의 독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권력의 교체일 뿐, ‘권력 없는 질서’의 창출이 아니었다.

프루동이 맑스의 혁명주의와 국가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맑스를 직접 비판한 적이 없다. 그때까지 맑스는 아직 유럽 노동운동 판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애송이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 대신 프루동은 국가주의 방법을 주창하고 있던 당대 노동운동의 최고 리더를 겨냥한다. 루이 블랑이었다.

 

블랑 씨는 지지치 않고 권위에 호소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큰 소리로 자신이 무정부주의라고 선언합니다. 블랑 씨는 권력을 사회 위에 위치시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것을 사회에 복속시키고자 합니다. 블랑 씨는 사회적 삶을 위에서 아래로 창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것이 지속적으로 아래에서 자라나서 위로 솟구치는 것입니다. 블랑 씨는 정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과학의 문제입니다. 위선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블랑 씨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당신은 기독교도, 왕정주의도, 귀족계급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신, 종교, 독재, 검열, 위계, 차별, 그리고 서열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로서는 당신의 신, 당신의 권위, 당신의 통치권, 당신의 사법국가, 그리고 당신의 모든 대의제 속임수를 거부합니다.
(프루동, <경제적 모순 시스템>)

 

프로동이 최고의 가치로 삼은 것은 ‘개인의 자유’였다. 현실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정부를 동시에 소멸시켜야 했다. 그러나 프루동은 ‘타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건설’까지 하고 싶었다. 그에 따라 그의 생각은 복잡해졌다. 그는 사유재산의 소멸을 주장했지만, 그것을 국유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국가기구의 소멸을 추구했지만, 자유주의 사회계약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자유주의와 국가주의를 동시에 부정하면서 프루동이 설정한 길은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의 변증법적 통일”이었다.

 

<프루동과 그의 아이들>, 쿠르베, 1865년

 

프루동의 이행전략은 그의 대안세상 그림과 서로 조응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과 국가의 권력이 사라지더라도 사회에는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생산수단도 존재해야 한다. 어떻게 생산수단을 운용해야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질서를 정립할 수 있을까?

프루동은 무산자대중이 ‘생산협동체’와 ‘코뮌’을 건설하고 확산시켜서 아래로부터 위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해나가는 길을 제안한다.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의 변증법적 통일은 정치경제 영역에서는 ‘생산자협동체’를 통해서 구현할 수 있으며, 정치행정 영역에서는 ‘코뮌연방제’를 통하여 구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될 대안세상은 ‘협동체들로 구성된 협동체’ 또는 ‘코뮌들로 구성된 코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