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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꺼리

[읽을꺼리] 4차 산업혁명과 고용의 미래_ (4) 정치적 선택 & 나가기

박장현 교육원 원장님의 「4차 산업혁명과 고용의 미래」 4회차가 드디어 마무리됩니다. 긴 글을 정독해오신 분이 계시다면 독후감을 e-품 편집팀(nodonged@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편집자주]

 

4차 산업혁명과 고용의 미래

- 프레이 대 서스킨드 논쟁 -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5. 정치적 선택

5-1. 낙관론자의 정치

  프레이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기술의 영역 바깥에 있는 또 하나의 전제조건을 추가한다. 이번에는 정치적 조건이다.

 

그런데 신기술은 노동역량의 강화를 요구한다. 노동인구를 신규 일자리로 복귀시킬 수 있는 고용창출 기술의 새로운 물결이 정점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거기에 딱 맞는 노동역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런 일자리를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 기술이 요구하게 될 노동역량을 사람들이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은 미래의 고용 규모를 결정하게 될 한 가지 핵심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가 요구된다. 현재와 미래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오늘날 정치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들에게 신기술 노동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교육정책을 펼치는 일이다.

 

  프레이는 20세기 후반기에 컴퓨터 기술이 1차 자동화 물결을 가져왔듯이, 21세기 초부터 인공지능 기술이 2차 자동화 물결을 가져오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변화가 당분간 고숙련 노동자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테지만, 중간숙련 노동자들과 저숙련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프레이는 자동화 물결이 가져올 미래 세계에 대하여 낙관적이다. 자동화 물결은 거부하고 회피해야 할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현재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이행 단계에서 중간숙련 노동자들과 저숙련 노동자들이 겪게 될 고통을 줄이는 과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프레이가 볼 때, 오늘날 정치가 맡아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미래를 조형하기 위한 정책들 중 프레이가 핵심으로 꼽고 있는 것은 교육정책이다. 교육을 통하여 더 많은 고숙련 노동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대비하는 최선의 정책이라는 뜻이다.

 

  프레이가 상정하고 있는 미래 사회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노동존중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완전고용 임금노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이다.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자면, ‘오늘날 서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이 이룩해놓은 성과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프레이가 요구하는 정치적 전제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그의 주장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또는 만약 그가 요구하는 전제조건이 교육정책을 통하여 달성되기 어려운 과제라면? 그럴 경우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5-2. 기술현실론자의 정치

  서스킨드는 기술결정론에 대해서 반대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술결정론에 대한 비현실적 반대에도 반대한다. 이런 제3의 관점과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서스킨드는 기술현실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기술결정론자들은 미래를 기술 변화의 종속변수로 본다. 그에 따라 그들은 정치를 통하여 미래를 조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하여 기술결정론 비판자들은 종종 주의주의 또는 구성주의 오류에 빠져든다. 미래는 오로지 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들은 기술 변화조차도 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 결과 그들은 현실의 기술 변화를 무시하거나 역행하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기술현실론은 관점과 입장에 있어서만 제3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행동과 실천에 있어서도 제3의 길을 걷는다. 기술 현실도 인정하는 동시에 정치의 필요성도 강조하는 길이다. 기술 발전 추세에 상응하는 정치를 통하여 미래를 조형하려는 길이다.

 

나는 기술결정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미래는 틀림없이 이러저러하게 펼쳐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술현실론자이기도 한 나는 우리가 아직 기술을 능력껏 구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우리는 오늘날보다 성능이 훨씬 더 뛰어난 시스템과 기계를 만들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벗어날 수 없는 미래의 모습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가 모두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17)

 

  서스킨드는 교육을 통한 숙련 향상 정책 정도로는 곧 닥쳐올 구조적 기술실업에 대비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서스킨드는 큰 정부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표현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고용관계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변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큰 정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큰 정부가 없다면 나날이 규모와 권력이 비대해지고 있는 기술 대기업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큰 정부의 핵심적 역할들 중에는 조건적 기본소득이 포함되어 있다.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액수를 지급하자는 보편적 기본소득이 아니다. 정치, 예술과 문화, 교육, 가사, 돌봄 등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활동을 수행한다는 조건부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이다.

 

  서스킨드가 상정하고 있는 미래 사회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노동해방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는 뜻이 아니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활동은 모두 노동에 해당된다. 그러나 더 이상 임금노동 또는 종속노동은 아니다. 지금까지 임금노동과 종속노동을 통하여 수행되어온 업무들은 앞으로 인공지능이 맡게 될 것이다. 서스킨드가 그리는 미래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의 너머에 있다.

 

6. 나가기 : 우리의 선택

  사람들은 관점에 따라 똑같은 것을 서로 다르게 본다.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똑같은 고용의 미래를 두고 이쪽 사람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저쪽 사람은 이번에는 다르다고 본다.

 

  왜 관점이 중요할까? 그것은 관점이 행동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관점의 차이는 관점의 차이로 머무르지 않고 행동의 차이로 이어진다. 여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용의 미래에 대하여 프레이와 서스킨드가 내놓고 있는 주장과 논거를 비교하면서 읽었다. 이제 우리의 입장을 정해야 할 차례이다.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입장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행동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 변화와 고용 변화 사이의 관계를 두고 보자면, 컴퓨터 기술이 추동한 3차 산업혁명의 혁명성은 업무 자동화에 있었다. 컴퓨터 기술은 그때까지 인간이 수행해온 업무들 중 틀에 박힌 업무들을 기계로 대체시켜나갔다. 프레이는 그것을 ‘1차 자동화 물결이라고 부른다. 20세기 후반기에 진행된 노동과 사회의 변화, 특히 노동 양극화 현상과 중산층 몰락 현상의 가장 밑바닥에는 컴퓨터 기술이 추동한 자동화 물결이 있었다.

 

  인공지능 기술은 고용관계를 다시 한 번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게 될까? 프레이는 그렇다고 본다. 그는 인공지능 기술이 차세대 자동화 물결을 추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2차 물결이 1차 물결과 다른 점은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들의 자동화에 있다. 컴퓨터 기술과 달리 인공지능 기술은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들도 자동화시킬 수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까지는 프레이와 서스킨드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의견의 갈라서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다음 질문이다.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의 자동화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틀에 박힌 업무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자동화의 한계선은 어디일까?

 

  프레이는 자동화 물결이 넘을 수 없는 한계선이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빼닮을 수 있는 한계선이 바로 자동화의 한계선이다. 그가 <고용의 미래>에서 인공지능의 공학적 장애를 확인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그 한계선 너머에는 인간이 맡아야 할 노동의 몫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고용의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전체 직업 중 47%는 자동화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문장이 아니다. 그 문장의 여백이 실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나머지 53%의 직업은 자동화되기 어렵다.”

 

  프레이와 달리 서스킨드는 자동화의 한계선을 고정시킬 수 없다고 본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자동화의 한계선이 점점 더 멀어져서 마침내 소실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노동에서 인간의 몫이 점점 더 줄어들어서 마침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프레이와 서스킨드를 갈라서게 만드는 질문은 실은 철학적인 질문인 동시에 정치적인 질문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빼닮아야 할까,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을까?

 

  그게 그것 아닐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인공지능 아닐까?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지금 프레이와 서스킨드가 벌이고 있는 논쟁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의 미래라는, 인류의 운명이 걸린 고지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한판 싸움이다. 프레이는 이렇게 소리치며 돌격하고 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서스킨드는 이렇게 외치며 반격하고 있다. “이번에는 다르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판이 아니다. 연구자 두 사람의 말싸움이 세상을 들었다 놓지는 못하겠지만, 두 사람이 펄럭이고 있는 깃발에는 인류의 운명을 가를 상반된 예언이 적혀 있다. 거기에는 상반된 실천 전략도 담겨 있다.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