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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문학

[노동인문학] 노동해방, 오래된 꿈_ (5) 홉스 : 자연상태의 인간

본 편은 원래 지난 화의 뒷부분이었던 부분을 분량 문제로 따로 편집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노동해방, 오래된 꿈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홉스 : 자연상태의 인간

 

오늘날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시조로 받들고 있는 (또는 받들어야 하는) 사람은 토머스 홉스이다. 그는 자연상태사회계약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개발하여 근대 자유주의 사회의 정신적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홉스는 중세 봉건주의 사회질서를 뒤집어엎기 위하여 인간세상의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자면 우리도 홉스와 함께 거슬러 올라가서 인간세상의 출발점을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인간세상의 출발점을 확인하는 작업은 실은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토머스 홉스 (1588~1679)

 

홉스는 자연상태의 인간에게서 두 가지 본성을 확인하였다. 한 가지는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본성이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다른 인간들의 육체와 공간적으로 분리된 하나의 육체를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해서, 모든 인간은 저마다 독립적인 입자로 존재한다. 육체성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들도 지니고 있는 본성이다. 이 본성은 자기보존욕구, 생명욕구, 자기보존본능, 생존본능으로 발현(發現)된다. 다른 한 가지 본성은 생각할 줄 안다는 본성이다. 이 본성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고, 인간만 지니고 있는 본성이다. 이 본성을 홉스는 이성이라고 부른다. 이성은 자기보존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방법을 계산하고 판단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자연권을 포기하고 자연법을 준수하기로 서로 동의하게 되는 것도 이성 덕택이다.

 

홉스가 자연상태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는 몇 대목을 읽어보자. 처음에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자연이 그들에게 부여해준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데, 그 결과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로 된다.

 

자연은 인간들을 뿔뿔이 흩어놓고, 서로 침략하도록 만들고 있다.(172쪽)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더 뛰어난 경우도 있겠지만, 양쪽을 모두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들 사이에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168쪽)

능력의 평등에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 즉 누구든지 동일한 수준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같은 것을 놓고 두 사람이 서로 가지려 한다면, 그 둘은 서로 적이 되고, 따라서 상대방을 파괴하거나 굴복시키려 하게 된다. 파괴와 정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경쟁의 주된 목적은 자기보존이다.(169쪽)

이와 같이 상호간에 불신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예상되는 위협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합리적 조치를 강구하게 된다. 그것은 곧 폭력이나 계략을 써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오랫동안 지배하여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무력화하는 일이다. 이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허용될 수밖에 없다.(170쪽)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common power)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171쪽)

 

자연상태 곧 전쟁상태 속의 인간들은 저마다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그것을 홉스는 자연권이라고 본다.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부당한 것이 될 수 없다. ... 전쟁에서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폭력과 기만뿐이다. ... 전쟁상태에서는 재산도 영토도, ‘내 것’과 ‘네 것’의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획득 가능한 모든 것이 자기 것이며, 자기 것으로 유지 가능한 동안 자기 것이다.(174쪽)

‘자연권’(right of nature)은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본성, 즉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뜻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 즉 그 자신의 판단과 이성에 따라 가장 적합한 조치라고 생각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176쪽)

여기서 인간의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오직 자신의 이성의 지배만 받을 뿐이며, 적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일은 무엇이든 하게 된다. 따라서 만인은 만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까지도 권리를 갖는다.(177쪽)

 

자연상태 곧 전쟁상태의 인간은 무한히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비참하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성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근로의 여지가 없다. 토지의 경작이나 해상무역, 편리한 건물,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기계, 지리에 관한 지식이나 시간의 계산도 없고,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172쪽)

 

이처럼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자연상태의 인간들을 전쟁상태로 몰아넣는 원동력으로 작동하지만, 거꾸로 인간들이 전쟁상태에서 빠져나와서 평화상태로 넘어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특히 이성은 개인들이 각자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개인들이 함께 평화상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방법을 찾아내고자 한다. 여기서 자연법개념과 사회계약개념이 생겨난다.

 

인간이 그러한 가혹한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성의 일부는 인간의 정념에서, 일부는 인간의 이성에서 생겨난다. 인간을 평화로 향하도록 만드는 정념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각종 생활용품에 대한 욕망, 그러한 생활용품을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 등이 있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들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적절한 평화의 규약(article)들을 시사한다. 이러한 규약들을 ‘자연법’(Laws of Nature)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174~175쪽)

자연법(lex naturalis)이란 인간의 이성이 찾아낸 계율(precept) 또는 일반적 원칙(general rule)을 말한다.(176쪽)

만인이 만물에 대하여 자연적 권리를 갖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어느 누구도 타고난 생명을 안전하게 누릴 수 있는 보장이 없다. 여기에는 강한 자이든 약한 자이든 예외가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이성의 계율 혹은 일반적 원칙이 등장한다. “모든 사람은, 달성될 가망이 있는 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를 달성하는 일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해도 좋다.” 이 원칙의 앞부분은 자연법의 기본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뒷부분은 자연권의 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방어하라”는 것이다. 평화추구의 의무를 규정한 기본 자연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제2의 자연법이 도출된다. “인간은 평화와 자기방어가 보장되는 한, 또한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그렇게 할 경우, 만물에 대한 자연적인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타인에 대해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177~178쪽)

 

홉스는 자연권개념과 자연법개념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자연적 권리로부터 사회적 의무를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권리’(jus)와 ‘법’(lex)을 같은 뜻으로 혼용하는데, 이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권리는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반면, 법은 어떤 일을 하도록 지시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과 권리는 의무와 자유만큼이나 서로 다른 것이며, 똑같은 방식으로 서로 다른 말이다.(177쪽)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들이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경위에 대한 설명이다. 기독교는 그 경위를 하느님의 섭리에서 찾았다. 하느님이 처음부터 인간들을 사회 속에서 살아가도록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에 반하여 홉스는 그것을 인간들의 자발적 동의에서 찾았다. 본래 전쟁상태에 있던 인간들이 평화상태로 넘어가기 위하여 각자의 자연권을 포기하기로 저마다 자유의지에 따라 동의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는 자발적 행위인데, 모든 자발적 행위는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 ... 모든 인간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또한 생명보존의 수단들을 안전하게 확보하여, 삶이 고단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리를 폐기하거나 양도할 때에도 바로 그러한 동기와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180~181쪽)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저마다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함께 전쟁상태를 끝내고 평화상태로 넘어가는 절차로는 계약, 그 중에서도 신의계약(信義契約)이라는 절차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계약은 나의 자연권을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계약상대방의 선의(善意)만 믿고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계약의 이행을 확고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강력한 장치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저 유명한 리바이어던이 등장하게 된다.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계약(contract)라고 한다. ... 이때 계약당사자 중 일방이 약정된 물품을 상대방에게 인도하고, 상대방의 채무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의 특정 시점에 이행하도록, 신뢰하고 기다릴 수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계약은 채무를 먼저 이행한 선이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약정(pact) 또는 신의계약(covenant)에 해당된다.(181쪽)

신의계약이 자연상태,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에서 체결되었다면, 어느 모로 보나 이 계약은 무효이다. 그러나 그들 쌍방에 대하여 약정된 채무를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충분한 권리와 힘을 가진 공통의 권력(common power)이 존재한다면, 그 계약은 무효가 아니다.(186쪽)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이다.(231쪽)

만인이 만인과 상호 신의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단 하나의 동일 인격으로 결합된다. 이것은 마치 만인이 만인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과 같다. “나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권리를 이 사람 혹은 이 합의체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단 너도 너의 권리를 양도하여 그의 활동을 승인한다는 조건 아래 그렇게 한다.” 이것이 달성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통일되었을 때 그것을 코먼웰스(Commonwealth) - 라틴어로는 키위타스(Civitas) - 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탄생한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의 신’(immortal God)의 가호 아래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mortal god)이 탄생하는 것이다.(232쪽)

 

요약해보자.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중세 봉건주의 사회질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사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자면 기독교가 주장해온 인간 본성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본성을 설정해야 했다. ‘하느님의 피조물에서 출발해서는 새로운 세상을 설립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홉스가 찾아낸 새로운 인간 본성은 동물성’(또는 입자성’)이성이었다. 이 두 가지 인간 본성에서 출발하여 그는 사회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에게 새로운 자연적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홉스는 중세 봉건주의 사회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질서의 주춧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자연상태사회계약의 토대 위에 설립될 새로운 사회질서가 인간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다시 역사가 대답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었다.

 

노동해방의 역사와 관련하여 홉스의 사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그가 인간에게 두 가지 본성만 부여했다는 점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사회적 동물은 아니다. 홉스가 볼 때, ‘사회성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 속성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사회는 자연상태의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상호의존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노동의 연결성, 즉 노동의 통한 상호의존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을 노동의 연결망 바깥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입자로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노동하는 타인들에 대하여 아무런 의존성도 느낄 필요가 없다.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의 노동감수성이다. 그리고 이런 감수성의 근대적 창시자는 바로 홉스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홉스의 후예들이 넘쳐나고 있다.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 한 사람이 근무 중에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에 대하여 대학 당국의 책임을 묻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울대학생 한 사람이 학내게시판 대나무숲에 자신의 의견을 올렸다. 청소노동자와 대학당국은 상호 자발적으로 체결한

계약관계에 있었으므로, 사회계약론의 경제학적 연장인 기회비용개념과 한계개념을 사용하여 사건을 판단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런 의견이 이른바 ‘MZ 세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을까? 이런 자유주의 감수성을 비판하면서 부산대학교 김영 교수는 노동의 연결성에 대한 감수성을 강조한다. “내가 향유하는 삶이 누구의 노동의 산물인지를 생각해 보라. 노동이 있어 세상이 있다. 이를 생각하는 게 시민으로서의 도덕이고 의무다”(한국일보 2021-07-15).  

이처럼 인간에게 새로운 자연적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홉스는 중세 봉건주의 사회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질서의 주춧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자연상태사회계약의 토대 위에 설립될 새로운 사회질서가 인간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다시 역사가 대답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었다.

 

노동해방의 역사와 관련하여 홉스의 사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그가 인간에게 두 가지 본성만 부여했다는 점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사회적 동물은 아니다. 홉스가 볼 때, ‘사회성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 속성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사회는 자연상태의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상호의존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노동의 연결성, 즉 노동의 통한 상호의존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을 노동의 연결망 바깥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입자로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노동하는 타인들에 대하여 아무런 의존성도 느낄 필요가 없다.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의 노동감수성이다. 그리고 이런 감수성의 근대적 창시자는 바로 홉스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홉스의 후예들이 넘쳐나고 있다.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 한 사람이 근무 중에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에 대하여 대학 당국의 책임을 묻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울대학생 한 사람이 학내게시판 대나무숲에 자신의 의견을 올렸다. 청소노동자와 대학당국은 상호 자발적으로 체결한 계약관계에 있었으므로, 사회계약론의 경제학적 연장인 기회비용개념과 한계개념을 사용하여 사건을 판단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런 의견이 이른바 ‘MZ 세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을까? 이런 자유주의 감수성을 비판하면서 부산대학교 김영 교수는 노동의 연결성에 대한 감수성을 강조한다. “내가 향유하는 삶이 누구의 노동의 산물인지를 생각해 보라. 노동이 있어 세상이 있다. 이를 생각하는 게 시민으로서의 도덕이고 의무다”(한국일보 2021-07-15).

 

서울대학교 대나무숲(페이스북 익명 제보공간) 캡쳐 1
서울대학교 대나무숲(페이스북 익명 제보공간) 캡쳐 2
서울대학교 대나무숲(페이스북 익명 제보공간) 캡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