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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PRISM] 전태일 열사 50주기, 다시 시작되는 시다들의 투쟁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 호의 발행일은 전태일열사 50주기 기일입니다. 전태일열사 50주기를 맞아 2회에 걸쳐 70년대 평화시장부터 현재까지 봉제노동자로 일하는 노동자의 인터뷰를 싣습니다. 고생해주신 혜정 작가님과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태숙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주]

 

전태일 열사 50주기, 다시 시작되는 시다들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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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 박태숙(전 청계피복노동조합 조합원, 현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조합원)

인터뷰어 : 기록노동자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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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얼마나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진=평등사회노동교육원)

 

  처음 만나는 인터뷰어를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던 박태숙 씨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결혼과 함께 활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일,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출산 후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던 과정,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 결국 집에 미싱 한 대 놓고 일을 받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 그녀의 이런 이야기들 곳곳에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이 배어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노동자들의 치열한 생존기다.

 

 

열 평 남짓 먼지투성이 공장에 갇혀 버린 시다의 삶

 

  그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생계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폐암 말기였다. 아픈데 병원비가 없어 집에 누워계셨다. 그녀는 초등학생의 작은 몸으로 이미 평화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두 언니를 따라 가족 부양의 책임을 안고 아침마다 출근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 학교의 절반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으로 갔던 시절이었다. 동네에도 그녀와 같이 평화시장을 간 친구들이 많았지만, 종일 공장 안에만 있으니 서로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수천벌을 만들어도 사 입을 수 없는 아동용 남방과 돕바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미싱사 언니들이 카라를 박아주면 코를 이쁘게 만들어 다림질을 하고, 재단한 천을 열을 가해 심지를 붙였다.

 

70년대 평화시장 공장 모습

 

  14살의 그녀는 미싱소리, 재단소리가 가득 찬 공장에서 재단사, 미싱사의 이야기를 못 알아들어 애를 먹었다. 그녀의 귓가에는 빨리빨리 해내라는 소리만 맴돌았다. 화장실도 못 가고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일을 했다. 철야근무를 한 어느 날에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미싱사 언니가 다락방 미싱판 위에 엎어져 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래에서 단추를 달고 실밥을 따고 있던 시다들이 모두 놀라 쳐다보았다. 그 언니는 잠에 취해 엉금엉금 기어 가 다시 잠들었다.

 

  종일 햇볕도 보지 못하고, 이르면 밤 10, 늦으면 밤 11시까지 일하다 집으로 왔다. 통행금지 시간에 맞춰 퇴근시간이 결정되었다. 사장은 일을 시킬 수 있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창을 닫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일을 하다 보니, 눈이 볕을 잊었다. 어쩌다 쉬는 일요일엔 볕에 눈이 부셔 실눈이 떠졌다. 천장이 낮아 키가 자랄수록 몸을 구부리고 다녔다. 일요일에 쉬기 위해 토요일엔 철야근무를 해야 했다. 그렇게 어린 여성노동자의 세계는 시다라는 이름으로 열 평 남짓한 먼지투성이 공장 안에 갇혀버렸다.

 

 

열사의 죽음, 어린 시다를 투사로 만들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날, 공장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깡패들과 싸우다 자기 화를 못 이겨 죽었다는 것이었다. 시다들은 아무도 전태일이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 이소선 어머니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도 깡패들 집단이라니까 무서워서 사람들이 모이질 않았다. ‘새벽이라는 모임으로 노동교실에 나가면서 그녀는 가려진 진실들을 알게 됐다. 그 사무실 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의 일기가 쓰여있었다. 그녀는 그 일기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그 글귀를 읽으면서 일기 속 어린 시다가 나구나, 했다.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해 죽었으니, 우리가 정말 열심히 해야겠구나 싶었단다. 때문에 물 불을 가리지 않고 노동조합 활동을 했노라 했다. 일요일을 쉬어야 하는 것이, 8시까지만 일을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임금을 받는 것이 우리의 권리라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고.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전태일열사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어머니 (사진=전태일재단)

 

  “우리 엄마는 노동조합이 빨갱이 집단이라고 무서워서 노동교실까지 쫓아와 나를 말렸어요. 그런데 노동자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돼. 누가 대신 해주지 않아. 이런 마음으로 버텼어요.”

 

  노동교실이 폐쇄될 위기에 놓였을 때도, 경찰들로 인해 문이 막혀있자 망설임도 없이 창문으로 기어 올라 들어갔다. 소방호스로 물을 뿌릴 때에도 재단 판을 들어 온 몸으로 막아냈다. 전태일 열사의 일기가 있던 그 공간은 그들에게 그런 의미였다.

 

 

50년을 돌아 다시 투쟁을 시작하다

 

  70년대의 전태일은 어린 시다들을 위해 몸에 불을 붙였다.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다 시다들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언젠가부터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생기고, 모두 하청업체 직원이 되었다. 업체에 따라 급여도 일자리도 들쑥날쑥하게 되었다. 세월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그 시절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지만 평화시장은 지금 70년대로 다시 돌아갔다고, “그래서 내가 이 나이에 다시 노동조합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이다. 50년 전 시다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는 누가 시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열쇠를 가지고 다니면서 본인들이 스스로 일을 한다. 현장은 70년대 전태일 그 시절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하청이라는 구조로, 특수고용이라는 고용관계로 단체협약의 대상도 모호해졌다. 재단사는 해고 1순위로 내몰렸다.

 

  “미싱사나 시다들은 객공(일용직)이니까 일이 있을 때만 출근하니까 상관없는데, 재단사는 일이 없어도 월급을 줘야 하니까 제일 먼저 잘리는 거죠. 그래서 요즘은 재단사도 일용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창립총회 (사진=미디어오늘)

 

  고령의 노동자들은 70년대 전태일의 시간에서 5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노동조합을 시작하려 한다. 그녀도 최근 봉제지회 조합원이 되어 조합원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서울시와의 단협을 준비하고 있다. 국가에 노동자들의 생존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을 시작한 것이다.

 

  박태숙씨의 말처럼 세월은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런 시간들을 다시 변화시켜 나갈 것이다. 열사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14살 박태숙 씨는 열사의 죽음으로 열 평 남짓한 공장 문을 열고 처음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시다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알게 했고, 50년이 지난 지금, 그녀들이 다시금 노동조합을 하겠다 결의하게 했다. 그 때의 경험이 그녀를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역사는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분명히 변했다. 도돌이표 역사지만, 잘 될 거라고 그녀는 단언한다.

 

  “잘 되겠죠. 잘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