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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꺼리

[읽을꺼리] 노동자계급에게 조국은 없다?

 

이번 호 <읽을꺼리> 꼭지에서는 최근 가장 큰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조국 사태에 관해 두 가지 입장을 기고받아 게재합니다. 반론과 기고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읽을꺼리> 꼭지에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은 [e-품] 편집팀(nodonged@gmail.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반대 입장은 (클릭하시면)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노동자계급에게 조국은 없다?

 

박장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이론은 언제나 매끈하고, 실천은 언제나 너덜너덜하다. 이론의 세계에는 검은 색과 흰색만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실천의 세계에는 - 괴테가 바로 보았듯이 - 회색만 있다.

 

  실천세계에 발을 담그는 한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이론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실천세계는 진한 회색을 검은색이라고 부르고, 옅은 회색을 흰색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서 양자택일 하는 곳이 아니라, 좀 덜 검은색과 좀 더 검은색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곳이다.

 

  평소에 입이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불쾌하다던 진중권이 -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 이른바 조국 사태내내 입을 닫고 지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뒷북을 치고 나선다. 사태의 본질은 진영논리가 아니라 공정성에 있단다. 공정성과 불공정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단다. 차라리 끝까지 입을 닫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연유는 궁금했겠지만, 가소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천의 세계는 선과 악이 충돌하는 곳이 아니라, 힘과 힘이 치고박는 곳이다. 더 큰 힘과 덜 큰 힘이 부닥치고, 깨지고, 합쳐지고, 흩어지는 곳이다. 그러니 아무도 매끈할 수 없다. 서로 너덜너덜해질 수밖에 없다. 매끈한 개는 수학의 세계와 미학의 세계에 존재할 뿐이다. 현실 세계에는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가 있을 뿐이다. 나도 뭔가 묻어 있을 것이다. 진중권은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을까?

 

  이론은 당/부당을 가르는 칼을 사용하고, 실천은 경중을 재는 저울을 사용한다. 이론의 세계에서 실천의 잣대를 들이대도 낭패로 되지만, 실천의 문제에 이론의 잣대를 들이대도 마찬가지이다.

 

  진보정치에 헌신하고, 만신창이가 되고, 절망한, 한 지인도 조국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영을 선택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시인 김수영의 쇳소리를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이 새끼도 개새끼, 저 새끼도 개새끼, 모두 개새끼!”

 

  그렇다. 개 같은 세상이다. 이곳에서 실천은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를 구별해야 하는 일로 되고, 필요할 땐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로 된다. 똥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물어죽이도록 내버려 둘까? 아니면 겨 묻은 개를 도와 함께 똥 묻은 개를 쫓아낼까? 다시없는 기회라고 한다.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여전히 정치를 갈망하면서도 진영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편을 든다면 당연히 겨 묻은 개 편을 들겠지만, 그랬다간 안에서 똥물을 뒤집어쓸 것이 두렵다. 그러니 이도저도 내팽개치고 경제투쟁의 현장으로 몰려가서 진정성과 선명성을 입증하는 것이 안전하다. 정규직화 고공농성을 하는 곳도 있고, 정리해고 단식투쟁을 하는 곳도 있다.

 

  노동운동 진영 안에서 지금 우리는 겨 묻은 개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사람으로는 - 내가 과문해서 더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 울산의 먹물활동가 김정호밖에 꼽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비주류 한쪽 귀퉁이에서 홀로 애쓰고 있는 그의 제안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내가 조국 사태를 판단하는 잣대는 공정성도 아니고, 진영논리도 아니다. 그보다 앞서 힘이다.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를 한꺼번에 몰아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조금치도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럴 힘이 없다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홀로 똥 묻은 개를 잡을 힘이 없으니, 겨 묻은 개와 힘을 합치자. 다만 뒷 놈은 뒤에 잡기로 하자.

 

  민주노총의 선택은 다르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과연 굿이 끝나고 나면 민주노총에게 떡이 돌아올까? 조국 사태가 끝나고 나면 아마 정치판에는 민주노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다. 민주노총 없이도 얼마든지 촛불을 성공시킬 수 있는데, 실력도 없으면서 값만 높게 부르는 민주노총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번번이 부조금도 내지 않고 품앗이도 마다하는 민주노총을 계속 대접해줄 필요가 있을까?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민주노총은 자신을 스스로 정치판에서 제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수록 자신을 경제투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